마른 강(江)두덕에서


서리맞은 잎들만 쌔울지라도
그 밑에야 강(江)물의 자취 아니랴
잎새 위에 밤마다 우는 달빛이
흘러가던 강(江)물의 자취 아니랴

빨래 소리 물소리 선녀(仙女)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물때 묻은 조약돌 마른 갈숲이
이제라고 강(江)물의 터야 아니랴

빨래 소리 물소리 선녀(仙女)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만나려는 심사(心思)


저녁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
저 먼 산(山)엔 어두워 잃어진 구름,
만나려는 심사는 웬 셈일까요,
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
발길은 마중을 가잔 말이냐.
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만리성(萬里城)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루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萬里城!)
 
 
 
 
 
맘 켕기는 날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켕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으며
세상을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여!
말을 나쁘지 않도록 좋게 꾸밈은
달라진 이 세상의 버릇이라고, 오오 그대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두세 번(番) 생각하라, 위선(爲先) 그것이
저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장사일진댄.
사는 법(法)이 근심은 못 같은다고,
남의 설움을 남은 몰라라.
말 마라, 세상, 세상 사람은
세상에 좋은 이름 좋은 말로써
한 사람을 속옷마저 벗긴 뒤에는
그를 네길거리에 세워 놓아라, 장승도 마찬가지.
이 무슨 일이냐, 그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제각금비위(脾胃)의 헐한 값으로
그의 몸값을 매마쟈고 덤벼들어라.
오오 그러면, 그대들은 이후에라도
하늘을 우러르라, 그저 혼자, 섧거나 괴롭거나.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몹쓸 꿈


봄 새벽의 몹쓸 꿈
깨고 나면!
우짖는 까막까치, 놀라는 소리,
너희들은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봄철의 좋은 새벽, 풀이슬 맺혔어라.
볼지어다, 세월(歲月)은 도무지 편안(便安)한데,
두새없는 저 까마귀, 새들게 우짖는 저 까치야,
나의 흉(凶)한 꿈 보이느냐?

고요히 또 봄바람은 봄의 빈 들을 지나가며,
이윽고 동산에서는 꽃잎들이 흩어질 때,
말 들어라, 애틋한 이 여자(女子)야, 사랑의 때문에는
모두다 사나운 조짐(兆朕)인 듯, 가슴을 뒤노아라.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끝 이렇지요,
그리워 살틀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무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붉으스름한 언덕, 여기저기
돌무더기도 움직이며, 달빛에,
소리만 남은 노래 서리워 엉겨라,
옛 조상(祖上)들의 기록(記錄)을 묻어둔 그곳!
나는 두루 찾노라, 그곳에서,
형적 없는 노래 흘러 퍼져,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저기,
그 누구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무신(無信)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엇이 무신(無信)함이 있더냐? 하고,
그러나 무엇하랴 오늘날은
야속히도 당장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물과 같이
흘러가서 없어진 맘이라고 하면.

검은 구름은 메기슭에서 어정거리며,
애처롭게도 우는 산(山)의 사슴이
내 품에 속속들이 붙안기는 듯.
그러나 밀물도 쎄이고 밤은 어두워
닻 주었던 자리는 알 길이 없어라.
시정(市井)의 흥정 일은
외상(外上)으로 주고받기도 하건마는.
 
 
 
 
 
무심(無心)


시집와서 삼년(三年)
오는 봄은
거친난벌에 왔습니다

거친 벌 난벌에 피는 꽃은
졌다가도 피노라 이릅디다
소식없이 기다린
이태 삼년(三年)

바로 가던 앞 강(江)이 간봄부터
구비 돌아 휘돌아 흐른다고
그러나 말 마소, 앞여울의
물빛은 예대로 푸르렀소

시집와서 삼년(三年)
어느 때나
터진 개여울의 여울물은
거친 벌 난벌에 흘렀습니다.
 
 
 
 
 
묵념(默念)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 제
홀로 창(窓)턱에 걸어앉아, 두 다리 늘이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첨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써
촌가(村家)의 액(厄)막이 제(祭)지내는 불빛은 새어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 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心靈)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 걸어 그대의 잠든 몸 위에 기대어라
움직임 다시없이,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조요(照耀)히 내려 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無限)히 더 가깝게.
 
 
 
 
물마름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지는 가지에서 재갈이던 때.
온종일 흐르던 물 그도 곤(困)하여
놀지는 골짜기에 목이 메던 때.

그 누가 알았으랴 한쪽 구름도
걸려서 흐느끼는 외로운 영(嶺)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디드냐 남이장군(南怡將軍)
말 먹여 물 찌었던 푸른 강(江)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뚝을 넘치는
천백리(千百里) 두만강(豆滿江)이 예서 백십리(百十里).

무산(茂山)의 큰 고개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예로부터 의(義)를 위하여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년래(三百年來)에
참아 받지 다 못할 한(恨)과 모욕(侮辱)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人力)의 다함에서 쓰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毒)된 삼천리(三千里)에 북을 울리며
정의(正義)의 기(旗)를 들던 그 사람이여.

그 누가 기억(記憶)하랴 다복동(多福洞)에서
피물든 옷을 입고 외치던 일을
정주성(定州城) 하룻밤의 지는 달빛에
애그친 그 가슴이 숫기 된 줄을.

물위의 뜬 마름에 아침 이슬을
불붙는 산(山)마루에 피었던 꽃을
지금에 우러르며 나는 우노라
이루며 못 이룸에 박(薄)한 이름을.
 
 
 
 
바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풀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 위에 앉아
사랑 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藍)빛 하늘에
저녁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 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좇니는 바다는 어디

건너서서 저편(便)은 딴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바다가 변(變)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저무는 봄 저녁에 져가는 꽃잎,
져가는 꽃잎들은 나부끼어라.
예로부터 일러 오며 하는 말에도
바다가 변(變)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그러하다, 아름다운 청춘(靑春)의 때에
있다던 온갖 것은 눈에 설고
다시금 낯 모르게 되나니,
보아라, 그대여, 서럽지 않은가,
봄에도 삼월(三月)의 져가는 날에
붉은 피같이도 쏟아쳐 내리는
저기 저 꽃잎들을, 저기 저 꽃잎들을.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드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란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夕陽)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드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歎息)을 얻으면서.

동(東)이랴, 남북(南北)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心情)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山)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바람과 봄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
작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
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盞)이라 하며 우노라.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들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어라 하며, 노래 불러라.
 
 
 
 
 
반(半)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 죽은 반(半)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춥구나,
흰 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두컴컴한 풀 없는 들은
찬 안개 위로 떠 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에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 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그무레히 꽃 지듯 한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워요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요
이리도 무던히
아주 얼굴조차 잊힐 듯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두운데요,
이곳은 인천(仁川)에 제물포(濟物浦),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바다 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하이얗게 밀어드는 봄 밀물이
눈앞을 가로막고 흐느낄 뿐이야요.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畢)하고 쉬이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太陽)은 내려 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恩惠)여, 살아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恩惠)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속을 차지하여라.

세계(世界)의 끝은 어디? 자애(慈愛)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太陽)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 새롭은 환희(歡喜)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 번(番) 활기(活氣)있게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란히 가즈란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어, 오오 생명(生命)의 향상(向上)이여.
 
 
 
 
봄밤


실버드나무의 검으스렷한 머리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감색(紺色) 치마에
술집의 창(窓)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는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워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섧고 그리운 새캄한 봄밤
보드라운 습기(濕氣)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봄비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부귀공명(富貴功名)


거울 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늙는 날 죽는 날을
사람은 다 모르고 사는 탓에,
오오 오직 이것이 참이라면,
그러나 내 세상이 어디인지?
지금부터 두여덟 좋은 연광(年光)
다시 와서 내게도 있을 말로
전(前)보다 좀더 전(前)보다 좀더
살음즉이 살련지 모르련만.
거울 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부모(父母)


낙엽(落葉)이 우수수 떠러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來日)날에
내가 부모(父母) 되어서 알아보랴?
 
 
 
 
부부(夫婦)


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나운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情分)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限平生)이라도 반백년(半百年)
못 사는 이 인생(人生)에!
연분(緣分)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나는 말하려노라, 아무려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부헝새


간밤에
뒷 창(窓) 밖에
부헝새가 와서 울더니,
하루를 바다 위에 구름이 캄캄.
오늘도 해 못 보고 날이 저무네.
 
 
 
 
분(粉) 얼굴


불빛에 떠오르는 새뽀얀 얼굴,
그 얼굴이 보내는 호젓한 냄새,
오고가는 입술의 주고받는 잔(盞),
가느스름한 손길은 아른대여라.

검으스러하면서도 붉으스러한
어렴풋하면서도 다시 분명(分明)한
줄 그늘 위에 그대의 목소리,
달빛이 수풀 위를 떠 흐르는가.

그대하고 나하고 또는 그 계집
밤에 노는 세 사람, 밤의 세 사람,
다시금 술잔 위의 긴 봄밤은
소리도 없이 창(窓) 밖으로 새여 빠져라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나는 아노라
무엇이 그대의 불운(不運)을 지었는지도,
부는 바람에 날려,
밀물에 흘러,
굳어진 그대의 가슴속도.
모두 지나간 나의 일이면.
다시금 또 다시금
적황(赤黃)의 포말(泡沫)은 북고여라, 그대의 가슴속의
암청(暗靑)의 이끼여, 거치른 바위
치는 물가의.
 
 
 
 
붉은 조수(潮水)


바람에 밀려드는 저 붉은 조수(潮水)
저 붉은 조수(潮水)가 밀어들 때마다
나는 저 바람 위에 올라서서
푸릇한 구름의 옷을 입고
불 같은 저 해를 품에 안고
저 붉은 조수(潮水)와 나는 함께
뛰놀고 싶구나, 저 붉은 조수(潮水)와
 
 
 
 
비난수 하는 맘


함께 하려노라, 비난수 하는 나의 맘,
모든 것을 한짐에 묶어 가지고 가기까지,
아침이면 이슬 맞은 바위의 붉은 줄로,
기어오르는 해를 바라다 보며, 입을 벌리고.

떠돌아라, 비난수하는 맘이어, 갈매기같이,
다만 무덤뿐이 그늘을 어른이는 하늘 위를,
바닷가의. 잃어버린 세상의 있다던 모든 것들은
차라리 내 몸이 죽어 가서 없어진 것만도 못하건만.

또는 비난수 하는 나의 맘, 헐벗은 산(山) 위에서,
떨어진 잎 타서 오르는, 냇내의 한줄기로,
바람에 나부끼라 저녁은, 흩어진 거미줄의
밤에 매던 이슬은 곧 다시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함께 하려 하노라, 오오 비난수 하는 나의 맘이여,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에는
오직 날과 날이 닭 소리와 함께 달아나 버리며,
가까웁는, 오오 가까웁는 그대뿐이 내게 있거라!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맛귀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 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 번(番)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려고 살려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조차 그러면, 이 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의 불붙는 사태흙에
집 짓는 저 개아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 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즐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 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삭주구성(朔州龜城)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三千里)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三千里)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리(六千里)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山)
밤에 높은 산(山)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四五千里)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南北)으로 오며 가며 아니 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산(山)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山)새는 왜 우노, 시메산(山)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七八十里)
돌아서서 육십리(六十里)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不歸).
사나이 이라 잊으련만,
십오년(十五年)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물에는 녹는 눈.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산(山) 위에


산(山)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가로막힌 바다를 마주 건너서
님 계시는 마을이 내 눈앞으로
꿈 하늘 하늘같이 떠오릅니다

흰 모래 모래 비낀 선창(船倉)가에는
한가한 뱃노래가 멀리 잦으며
날 저물고 안개는 깊이 덮여서
흩어지는 물꽃뿐 안득입니다

이윽고 밤 어두운 물새가 울면
물결조차 하나 둘 배는 떠나서
저 멀리 한바다아주 바다로
마치 가랑잎같이 떠나갑니다

나는 혼자 산(山)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해 붉은 볕에 몸을 씻으며
귀 기울고 솔곳이 엿듣노라면
님 계신 창(窓) 아래로 가는 물노래

흔들어 깨우치는 물노래에는
내 님이 놀라 일어나 찾으신대도
내 몸은 산(山) 위에서 그 산(山) 위에서
고이 깊이 잠들어 다 모릅니다
 
 
 
 
산유화(山有花)


산(山)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山)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山)에서
사노라네

산(山)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새벽


낙엽(落葉)이 이 숨는 못물가에
우뚝우뚝한 나무 그림자
물빛조차 어섬푸레히 떠오르는데,
나 혼자 섰노라, 아직도 아직도,
동(東)녘 하늘은 어두운가.
천인(天人)에도 사랑 눈물, 구름 되어,
외로운 꿈의 베개, 흐렸는가
나의 님이여, 그러나 그러나
고이도 붉으스레 물 질러 와라
하늘 밟고 저녁에 섰는 구름.
반(半)달은 중천(中天)에 지새일 때.
 
 
 
 
생(生)과 사(死)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 역시(亦是) 그럴듯도 한 일을,
하필(何必)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山)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서울 밤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넓다란 거리면 푸른 전등(電燈).
막다른 골목이면 붉은 전등(電燈).
전등(電燈)은 반짝입니다.
전등(電燈)은 그무립니다.
전등(電燈)은 또다시 어스렷합니다.
전등(電燈)은 죽은 듯한 긴 밤을 지킵니다.

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
어둡고 밝은 그 속에서도
붉은 전등(電燈)이 흐드겨 웁니다.
푸른 전등(電燈)이 흐드겨 웁니다.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머나먼 밤하늘은 새캄합니다.
머나먼 밤하늘은 새캄합니다.

서울 거리가 좋다고 해요.
서울 밤이 좋다고 해요.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나의 가슴의 속 모를 곳의
푸른 전등(電燈)은 고적(孤寂)합니다.
붉은 전등(電燈)은 고적(孤寂)합니다.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香爐)의 향(香)불.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초닷새 달그늘에 빗물이 운다.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수아(樹芽)


설다 해도
웬만한,
봄이 아니어,
나무도 가지마다 눈을 텄어라!
 
 
 
 
실제(失題)(1)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
해지고 오늘날은 가노랍니다
윗옷을 잽시빨리 입으십시오
우리도 산(山)마루로 올라갑시다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빛이 납니다
이제는 주춤주춤 어둡습니다
예서 더 저문 때를 밤이랍니다

동무들 보십시오 밤이 옵니다
박쥐가 발부리에 일어납니다
두 눈을 인제 그만 감으십시오
우리도 골짜기로 내려갑시다
 
 
 
 
실제(失題)(2)


가람과 저 가람이 모두처 흘러
그 무엇을 뜻하는고?

미더움을 모르는 당신의 맘

죽은 듯이 어두운 깊은 골의
꺼림직한 괴로운 몹쓸 꿈의
퍼르죽죽한 불길은 흐르지만
더듬기에 지치운 두 손길은
불어 가는 바람에 식히셔요
밝고 호젓한 보름달이
새벽의 흔들리는 물 노래로
수줍음에 추움에 숨을 듯이
떨고 있는 물 밑은 여기외다.

미더움을 모르는 당신의 맘

저 산(山)과 이 산(山)이 마주서서
그 무엇을 뜻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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