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오시는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離散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시간이 왔다
「그럼 난 떠나야지」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일렀다

「다시 우리 오게 되는 땐 
   집이 없어졌더라도 이 터전에서들 만나기로 하자」

아이 어른은 대답 대신 와- 울음이 터져버렸다
태극기에서 떨어지는 날은
이렇듯 몸둘 곳이 없어졌다 ―

대한민국이 죽은 사람모양 그리웠다


이름없는 여인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유명하다는 것

유명하다는 건 얼마나 거북한 차림 차림이냐
이 거추장스런 것일래
나는 저기서도 여기서도
걸려 넘어지고
처참하게 찢겨졌다
아무도 관심을 안 해주는 자리는
얼마나 또 편한 위치냐

 
오월의 노래

보리는 그 윤기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숲 사이 철쭉이 이제 가슴을 열었다

아름다운 전설을 찾아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불로초 같은 오후의 생각을 오늘도 달린다

부르다 목은 쉬어
산에 메아리만 하는 이름.......

더불어 꽃길을 걸을 날은 언제뇨
하늘은 푸르러서 더 넓고
마지막 장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라
그리고 폭풍이 불어다오
이 오월의 한낮을 나 그냥 갈 수는 없어라


 
오늘

무엇에 쫓기는 것일까
막다른 골목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가 쫓기는 것만 같다
나를 따르는 것은 빚쟁이도 아니요
미친개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원수는 아니다

밤의 안식은 천년의 세월이 덮은 듯 아득한 전설
네거리 횡단길에 선 마음
소음에 신경은 사정없이 진동되고
내 눈은 고달파 핏줄이 섰다

밤 天井의 한 마리의 거미가
보기 좋게 사람을 위협할 수도 있거니
무엇에 쫓기는 것일까
막다른 골목으로 내가 쫓긴다

불안한 날들이 낯선 정거장모양 다닥치고
털어버릴 수 없는 초조와 우수가
사월의 신록처럼
무성하다


 
연자간

삼밭 울바주엔 호박꽃이 화안한 마을
눈가린 말은 들방아를 메고
한종일 연자간을 속아 돌고
치부책을 든 연자지기는 잎담배를 피웠다
머언 아랫말에 한나절 닭이 울고
돌배를 따는 아이들에게선 풋냄새가 났다
밀을 찧어가지고 오늘 친청엘 간다는 새댁
대추나무를 쳐다보고도 일없이 좋아했다

 
女人賦

미용사에게
結髮을 읽히는 대신
무릇 여인이여
온달에게서 '바보'를 배우라

총명한 데에 여인은
가끔 불행을 지녔다

진실로 아리따운 여인아
네 생각이 높고 맑기
저 九月의 하늘 같고
가슴에 지닌 향랑보다
너는 언제고 마음이 더 향그러워라

여인 중에
학처럼 몸을 갖는 이가 있어 보라
물가 그림자를 보고
외로워도 좋다
海燕은 어디다
집을 짓는지 아느냐


 
언덕

창으로 하늘이 돌아온다
눈만 뜨면 내다보는 언덕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안 뵌다

방안 풍경이 보기 싫어
온종일 언덕을 바라본다
사람이 지나가면 눈이 다 밝아진다

전봇대모양 우뚝 선 사람이 둘
혹시 나 아는 이가 아닐까

가슴이 답답하면 언덕을 본다
눈물이 나면 언덕을 본다

이방 같아 쓸쓸하면 언덕을 본다
언니랑 조카가 보구프면 언덕을 본다


 
어떤 친구에게


같은 별 아래 태어난 여인이기에
너와 나는 함께 울었고 같이 웃었다

너를 찾아 밤길을 간 것도
내 가슴을 펼 수 있는 네 가슴이었기 -

대학 교정에서 그대를 만났을 제
내 눈은 신록을 본 듯 번쩍 띄었고
손길을 잡게 되던 날 내 가슴은 뛰었었나니
그대와 나는 자매별모양 빛났더니라

어떤 사람은 너를 더 빛난다 했고
다른 이 또 나를 더 좋다 했다

너와 나 같은 동산에 서지 않았던들
너 나를 이런 곳에 밀어넣지는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얼마나 더 정다웠으랴


 
약속된 날이 있거니

박꽃이 지붕 위에 흰나비모양 앉은 저녁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조국과 민족과 독립을 얘기했다
바다로 - 바다로 - 나는 바다로 가리
두 다리 뻗고 앉아
바람 함뿍 가슴에 안아보련다

그래도 시원치 않으리라
달랠 수 없는 가슴
기댈 데 없이 지내기 삼십육년

구박과 눈치에 기죽어
설사리 자란 우리 형제
모진 채찍 아래 눈과 눈 마주치면
말을 삼킨 채 서로 눈물 어렸었나니

그때 일 생각한들 차마 오늘
우리 서로 다툴 건가
불행했던 날을 불러보면
서로 껴앉고 울어도 남을 것을
원수도 아니요 이방사람 더구나 아닌 -

오늘
서로 눈초리 사납게 지나침은
간밤에 어느 마귀가 뿌리고 간
악의 씨뇨

우리에게 약속된 빛나는 날이 있거니
장미꽃 아름답게 피워야 할
거리 - 거리에 -

어언 남부끄런 욕설의 '방'들인고
그 앞에 통곡하고 싶음은
이 딸 하나뿐 아니리라

집집이 추녀끝에
조국의 깃발 고요히 오늘
독립의 엄숙한 아침을 위해
형제여 다같이 달게 우리는
이름없는 투사가 되자

그리하여 괴로운 역사의 바퀴를 굴리자
앞으로- 앞으로 -
조국의 여명은 가까워진다

머지않아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
저 산마루에 떠오를 게다


 
夜啼鳥

낙엽을 가져다 내 창가에 끼얹고는
말없이 찬 달 아래 떨고 서 있는
네 마음을 알아듣는 까닭에
이 밤에 내가 굳이 窓帳을 내리었노라

밤새가 네 가슴을 쪼(啄)지 않느냐
슬픈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

쪼각달이 네 메마른 팔 위에 차가웁고
16세 소녀인 양 이처럼 감상적인 저녁엔
茶를 끓이는 대신
과자의 은빛 종이를 벗기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뉘도 몰래
멀리 멀리 가버리고 싶은 날이 있어
메에 올라 낯익은 마을을 굽어보다
빨-간 고추가 타는 듯 널린 지붕이--
쨍이를 잡는 아이들의 모습이--

차마 눈에서 안 떨어져
한나절을 혼자 산 우에 앉아보다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아름다운 새벽을

내 가슴에선 사정없이 장미가 뜯겨지고
멀쩡하니 바보가 되어 서 있습니다.

흙바람이 모래를 끼얹고는
껄껄 웃으며 달아납니다
이 시각에 어디메서 누가 우나봅니다

그 새벽들은 골짜구니 밑에 묻혀버렸으며
연인은 이미 배암의 춤을 추는 지 오래고
나는 혀끝으로 찌를 것을 단념했습니다

사람들 이젠 종소리에도 깨일 수 없는
악의 꽃 속에 묻힌 밤
여기 저도 모르게 저지른 악이 있고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가 있을 겁니다

성모 마리아여
임종모양 무거운 이 밤을 물리쳐주소서
그리고 아름다운 새벽을

저마다 내가 죄인이노라 무릎 꿇을-
저마다 참회의 눈물 뺨을 적실-
아름다운 새벽을 가져다 주소서


 
아들 편지

숱한 학병들 틈에 끼여
아들이 입영한 지도 여러 달 전

등잔 심지를 돋우며 돋우며
농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편지를 또 꺼냈다

읽고 다시 읽고
겉봉을 뒤적거려
보고는 다시 보고
아들이 가 있는
구마모도라는 곳이
어머니는 지금
고향보다 더 그리워
밤이면 꿈마다 찾아가 더듬는다
 


 
除夜


멀리 갔던 이들 돌아오고
풍성풍성히 저자도 보는 명절날

돌아갈 수 없는 집 있어
먼 하늘 바라보며 기둥모양 우뚝 섰다

별은 포기포기 솟아
모두 다 식구들의 얼굴이 되다

'희'야 새날이 와
내가 돌아가는 날 너도 떡을 빚고 술을 담그자

 
저버릴 수 없어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이 땅을 저버릴수 없어
불타는 가슴을안고
오늘도
보리밭 널린 들판을 달리다

착한 사나이가 논을 갈고
지어미가 낮밥을 이고 나온 논뜰
미나리 냄새 나는 흙에 입맞추고 싶구나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이 땅을 저버릴수 없어
노여운 눈초리를
오월의 푸른 가랑잎으로 씻어보다


 
저녁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 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저녁


나이 갓 마흔에도 장가를 못 간 칠성이가
엄백이 짚신을 삼는 사랑 웃구둘에선
저녁마다 몰꾼들이 뫼구
古談冊 읽는 소리가 들리구
밤이 이슥해 삽살개가 짖어서 보면
국수들을 시켰다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꺽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버리련다
하늘보며 나무모양 우뚝 서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버리련다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잔치

호랑담요를 쓰고 가마가
웃동리서 아랫말로 나려왔다

차일을 친 마당 멍석 우엔
잔치 국수상이 벌어지구
상을 받은 아주머니들은
이차떡에 절편에 대추랑 밤을 수건에 쌌다

대례를 지내는 마당에선
장옷을 입은 색시보담두 나는
그 머리에 쓴 칠보쪽도리가 더 맘에 있었다


 
작약

그 굳은 흙을 떠받으며
뜰 한구석에서
작약이 붉은 순을 뿜는다
늬도 좀 저모양 늬를 뿜어보렴
그야말로 즐거운 삶이 아니겠느냐
육십을 살아도 헛사는 친구들
세상눈치 안 보며
맘대로 산 날 좀 帳記에서 뽑아보라

젊은 나이에 치미는 힘들이 없느냐
어찌할 수 없이 터지는 정열이 없느냐

남이 뭐란다는 것은
오로지 못생긴 친구만이 문제삼는 것
남의 자(尺)는 남들 재라 하고
너는 늬 자로 너를 재일 일이다

작약이 제 순을 뿜는다
무서운 힘으로 제 순을 뿜는다


 
작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은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도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하고
나는 흰 댕기 늘인 삼또아리를 쓰구
상여가 동리를 보구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키를 하고 --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처럼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꺽어는 질지언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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